[기고] 말기를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
말기를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2026.09.22. 오전 12:10[김대균의 아름다운 배웅, 따뜻한 동행]
⑨ 우리는 왜 말기가 없는가
남자 8명, 여자 11명. 17병상으로 운영되는 내가 근무하는 호스피스병동의 오늘 대기 명단이다. 경험상 이분들 중 절반 이상은 끝내 얼굴을 뵙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병실이 비어 순서대로 연락드리면 “기다리다 너무 힘들어 요양병원에 갔고 이미 돌아가셨다”는 원망 섞인 답을 듣기 일쑤다.
얼마 전에도 항암치료를 이어오던 한 환자가 임종을 며칠 앞두고서야 호스피스를 권유받았다. 가족은 “조금만 일찍 이런 얘기를 들었더라면 집에도 다녀오고 하고 싶은 말도 나눴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말기’가 없는 환자가 너무 많다. 말기를 인정하는 순간 희망을 포기하는 것처럼 여기는 의료 문화 속에서 의사도 가족도 어려운 얘기를 미룬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임종기 통보만 남는다. 호스피스가 처음 소개되는 시점이 임종 직전이라면, 가장 중요한 대화를 나눌 시간은 이미 사라진 뒤다.
그러나 말기는 포기의 시간이 아니다. 살아온 관계를 정리하고 기억을 남기고 남은 하루하루를 자신답게 설계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건너뛰고 맞는 임종은 환자와 가족에게 준비 없이 닥친 돌연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호스피스는 바로 이때 통증뿐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 삶의 의미에 대한 혼란까지 함께 돌보는 의료다.
입원 가능한 호스피스 병상이 부족한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그러나 병상만 늘린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입원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외래에서 통증과 증상을 조절하고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하며 가정형이나 입원형 호스피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통로가 필요하다. 지금의 자문형 호스피스가 병원 입원 환자 중심에 머물지 않고 외래로 더 넓어져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질환을 오래 치료해온 의사들이 ‘더 할 치료가 있는가’만큼 이제 ‘삶의 마지막 국면에 들어섰는가’를 알아차리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질병의 진행, 기능 저하, 반복되는 입원과 감염 같은 신호를 읽고 치료 목표를 바꿀 시점을 환자와 가족에게 설명하는 것 역시 치료의 일부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의 돌봄을 미뤄서는 안 된다. 좋은 호스피스는 임종 직전에 들어가는 병실이 아니다. 말기를 알아차린 순간부터 환자와 가족 곁에 서서 남은 시간을 함께 설계하는 동행이어야 한다.
김대균 인천성모병원 권역별호스피스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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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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