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 찰나의 시간에 마주한 우리] 6. 환자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의사 2024.05.02

환자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의사

의사 고기동

가천대 길병원


가정의학 전공의 수련 과정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어느 정도 갖출 수 있었고, 본원 근무 초기에 ‘호스피스 표준 교육’도 이수하였지만 호스피스 영역은 뭔가 낯설고 두려운 지점이 있었다. 다행인지 몰라도 내가 본원에 오기 전부터 호스피스 입원환자 돌봄은 우리 가정의학과를 중심으로 업무 인력과 분담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기에, 내가 실제로 호스피스 환자 돌봄에 참여할 기회는 없었다. 이렇게 길병원에 근무한 지 벌써 10년 가까이 흐른 작년 3월부터 우리 과/병원 내 여러 가지 사정으로, 기존 교수님을 도와 호스피스 입원환자 돌봄을 분담하게 되었다. 업무 관련한 염려와 걱정도 있었지만,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은 그동안 우리 과 특성상 자주 경험하지 못했던 임종에 가까운 환자를 돌보고 그분들의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무렵 어느 날 나는 한가로이 누워 시간을 보내다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느낀 것은‘죽음이 두려움’이었다. 죽음에 따라 내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큰 공포였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죽음이 끝인 삶의 허무함’을 많이 느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요즘 들어서는 내 종교적 믿음도 성장하고 나이가 들어서인지 죽음 그 자체보다는 반대급부로‘한 번인 삶의 소중함과 감사’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나의 가치관 또는 생각은 많이 진화했지만, 돌보던 환자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것은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호스피스 환자분들을 1년 남짓 보면서 고민하고 깨달았던 것은, 내가 하는 돌봄의 최선과 범위에 관한 것이었다. 외래 환자를 보면서도 난 ‘내 진료가 최선인지?,‘내가 환자의 의학적 문제(때로는 그 이상의…가족 문제 같은…)를 포괄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를 자주 생각해보곤 했다. 하지만 호스피스 환자나 보호자에게 있어서 ‘최선의 돌봄’은 다른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의 진료에서 나의 최선은 어찌 보면 내 위주의 최선이었다고 한다면, 호스피스 환자를 돌봄에 있어서는 그 돌봄을 받는 환자나 보호자가 좀 더 우선이 되는 최선이어야 함을 말이다. 또한 호스피스 환자. 보호자 돌봄은 신체적 증세, 심리적 어려움, 영적 문제, 가족 문제, 임종 준비 등을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에, 한 직역의 노력이나 능력으로는 완전할 수 없다. 간호사, 사회복지사, 성직자, 봉사자 등등 많은 분과의 대화와 협조를 통해 우리 환자들에게 좀 더 나은 포괄적 돌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전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보면서 느꼈던 생각의 단편이 문득 떠오른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기 쉽지만, 역설적으로 임종에서야 최종적인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군의관이었던 시절에“위중한 환자를 늘 보면 힘들지 않으냐"라는 내과 군의관 형에게 던진 나의‘진로 탐색형’ 질문에 “힘들더라도 환자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의사여서 보람 있다”라는 의외의 답에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결국 나는 환자 돌봄에 있어 조금 다른 지향점을 가진 가정의학과 의사가 되었지만, 결국 생을 마감하는 환자 옆에 다시 서게 되었다. 이 환자분들이 신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 없이 ‘삶의 의미’에 마침표를 잘 찍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