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 찰나의 시간에 마주한 우리] 7. 관계 2024.05.13

관계

목사 심미자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우리 일산병원은 2012년 호스피스 병상이 신설되면서 말기 환자와 가족이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인 돌봄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활동이 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문 병동이 신설되기 전에도 일찍부터 호스피스 환우들을 돌보는 전문의료진들이 병상을 회진하며 환자들을 돌보는 광경을 많이 봐온 터라 그래도 병상이 신설되면서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죽음을 앞에 둔 환자들에게나 가족을 생각해보면 호스피스 전문병원으로 운영된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실감한다.


병원 사역을 시작한 지 17년 차를 보내면서 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며 그 한 사람이 죽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그 인생이 어떻게 살았겠다고 하는 삶의 과정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생각 나는 한 사람이 있다. 지인의 기도 부탁을 받고 찾아간 환자인데 40대 중반, 첫날 찾아갔을 때는 누워 잠을 자는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어느 날 방문했을 때 식사를 조금 할 수 있게 되니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많이 힘이 들어 보이네요. 우리 같이 하나님께 기도할까요?” 하니 허락을 하여 만남이 이루어졌다.

매일 찾아갔다. 식사하고 며칠 좋아지는 듯하니 그래도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제 항암치료를 시작하니 다시 먹는 것이 어렵게 되어 거의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도 환자의 팔을 잡고 기도할 때마다 아멘 하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마음에는 건강관리를 잘 하지 않고 살아서 건강을 잃게 된 아쉬워하는 맘이 컸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는지 혼자였고, 그리고 돈을 벌어보고자 무던히 애썼지만 되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저 인생이 고달팠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너무 힘들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잘해보려고 하는 맘은 늘 갖고 있었지만 먼저 돈을 번 다음에 교회 간다 그런 생각으로 살았는데, 이런 불행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기도했다. 특히 연로하신 부모님께 죄송한 생각에 맘 아파했다. 본인 뜻은 돈 많이 벌어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리고자 하는 맘으로 이일 저일 손을 대 보았지만, 실패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고 했다. 자기의 인생이 너무도 허무하여야 하는 그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의 팔을 잡고 기도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이제부터는 후회를 만회할 기회라고, 이 세상 떠나면 후회할 기회도 없고 아쉬움도 해결할 수 없으니 지금이 바로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준비를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결국 호스피스병동에서 마지막 생을 마치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하는 날 신을 벗고 침대로 올라간 이후 한 번도 그 신을 신어보지 못하고 그렇게 가버렸다. 너무도 불쌍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분이 저와 같이 맘을 나누고 이야기 상대를 해주었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했다. 그래서 그를 소개한 지인이 장례를 치르고 며칠이 지나서 원목실에 찾아오셨다. 부모를 대신하여 아들이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고, 또 저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응해 준 그 환자가 고마웠다.


작년에 돌아가신 82세 된 할아버지다. 코로나 방역 방침으로 호스피스 병동이 그 시스템으로 운영되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입원해 계셨다. 암 환자들의 생활은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이 입·퇴원을 번복하는 과정에 많이 지쳐들 가신다. 이 어르신도 몇 번의 치료과정을 통해 이제는 임종을 가까이 둔 환자가 되었다. 천주교 신자임에도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항상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셨다. 외로움이 많으시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하다.

아내하고도 이혼했다, 몇 년을 살았는지 혼자 생활한 지가 꽤 되신 것 같았다. 코로나 사태로 가족 방문이 전혀 할 수 없으니 의지하는 것은 저 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매일 찾아가 이야기 들어주고 기도하고 본인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 주셨다.

그런데 자식들이 전화도 안 받고 오지도 않고 본인이 살던 집도 변변치도 않은 집이었는데 입원해 계신 중에 처분해 버리고 퇴원하면 갈 곳도 없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몇 푼 안되는 집인 것 같은데 그것마저 자식이 없앴다고 얼마나 서글퍼하시는지 자식에 대한 원망이 컸다. 그 상처로 병이 더 악화되었다고 하신다. 딸도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고 서러워 눈물이 난다.

그러시면서 저에게 임종할 때까지 자기를 지켜달라고 말씀하셨다. 자식들이 전화해도 받지 않으니 혼자 죽을 거 같아 불안해하셨다. 그래서 매일 만나면 손잡고 기도하고 속상한 맘을 달래 주며 지내는 동안 할아버지도 이제는 내가 오는지 가는지 모르는 순간이 왔다. 가래도 힘들고 숨 쉬는 것이 힘들어 선생님들의 손길이 바빠지지만, 할아버지는 괴로움을 호소한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겠지 생각하니 그렇게 보고 싶은 자식들이 오면 그래도 정신이 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식이더라. 마지막 안정실에서 준비할 때 보면 숨을 거두려는 마지막 순간에 자식이 와서 아버지! 어머니! 하며 자식 목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듣고 꿈틀거리며 표현을 할 때 나는 정말 부모는 죽어도 자식밖에 없구나! 하는 현장을 이곳에서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끝내 그 어르신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시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드님! 아버지가 아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셔요? 눈 감는 순간까지 아들 자식 기다리다 가셨어요.’라고 눈물 흘리고 있는 아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영적 돌봄으로 사역을 하면서 가장 크게 경험하는 것이 있다. 죽음의 현장에서 그 사람이 어떤 관계를 이루고 살았는지에 대한 그 사람의 생애를 다 볼 수 있었다.

첫째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다. 천국에 소망을 갖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하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살았느냐 하는 것도 볼 수 있고 그래서 찾는 이가 많고 죽은 이의 얼굴도 아름답게 보였다. 가족관계, 특히 부부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작년에 돌아가신 어떤 할아버지께 “ 할아버지, 아내에게 여보 고마워! 자식 놓고 살아줘서, 그리고 여보 미안해 고생시켜서 그렇게 환자에게 시킨 적이 있다. 그다음 날 갔더니 아내의 말에 의하며 한 번도 사랑한다 또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이 몇십 년을 살았는데 어제 그 말을 했다는 것이다. 평생 듣지 못한 남편의 그런 고백을 듣게 되었다고 환한 모습으로 말씀하신 아내가 계셨다.

그리고 자녀들과의 관계다. 위에 말한 그 어르신 댁의 자녀들과 같은 가정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았다.

그리고 형제, 친구, 이웃과의 관계다. 우리 병원에서 폐암으로 소천하신 장로님이시다. 환자가 가진 신앙으로 두려움 없이 마지막 가는 길을 잘 준비하며 특별히 기도해준 나에게도 그간 고마웠다고 인사까지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이 세상을 떠나신 장로님이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병문안을 오고, 또 장례식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가는 것을 보면서 장로님은 참 잘 사셨구나 하고 속으로 말한 때가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분의 가시는 길이었다.


이곳에서 환자들과의 사역을 통해 하늘로나 땅으로나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이 복 있는 자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나 역시도 그날을 위해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고 남은 사역에 맘을 다해야 함을 다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