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 찰나의 시간에 마주한 우리] 10. 사별 가족 모임 단상 2024.05.27

사별 가족 모임 단상

의사 황인철

가천대 길병원


기분 나쁜 어깨통증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오전엔 그리도 화창하던 날씨가 저녁이 가까워져 오자 무섭게 흐려지더니 어김없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신발이 젖은 건 아닐 텐데, 발걸음이 무겁다. 십 년째 치르는 연중행사건만.


몇 해 전이었다. 남편은 건장한 체격의 퇴역 장교였다. 감사와 반가움으로 어우러지는 행사 속에서 유독 쀼루퉁한 입술이 눈에 띄었다. 휴식 시간에 내 옆자리에 앉는다. “교수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지방에서 올라왔습니다.”


무뚝뚝하게 필요한 말만 툭툭 내뱉었으며, 군인 특유의 명령하는 어투가 늘 귀에 거슬렸다. 자식들과 교대로 병간호를 했었는데, 우연이라기엔 이상하리만치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을 시간에 오곤 했다. 부인은 담낭암 말기였는데 담도염이 전신으로 퍼져 패혈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퇴근 무렵 환자의 생체징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임종실로 옮겨서 지켜보기로 했었다. 말이 지켜보는 것이지, 몇 가지 징후를 조합하면 그날 밤을 못 넘길 확률은 99.9%였다. 다음 날 아침, 특별할 것도 없이 임종실은 비어 있었다.


“제 아내가 가던 날 밤에, 교수님이 오실 줄 알았습니다.”

“네? 아 네…. 집은 다른 도시에 있어서 빨리 와도 40분이 넘게 걸립니다. 그리고 일주일에도 두 분씩 돌아가시는데 그때마다 제가 어떻게….”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바로 알았다. 그가 서운했던 건, 특별대접을 못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병원장실을 통해 잘 부탁한다는 언질을 받긴 했지만, 그런 식의 연락이야 흔한 일이었다. 그쯤 되면 얘기를 끊는 게 좋다. “제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오늘은 사별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다.


***


두어 시간 전부터 간호사와 사회복지사, 그리고 자원봉사자분들이 행사를 준비한다. 공연 준비까지 생각한다면 며칠이 걸리는 셈이다.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소모임을 하고, 1년에 한 번은 그해 임종하신 모든 가족을 대상으로 취지를 설명해드리고 참여를 독려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얼마나 좋은 추억으로 간직될까마는, 그나마 괜찮은 마무리였다고 생각하는 가족들이나 우리 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하는 분들이 주로 참석한다. 행사 초반에 사별 가족 대표의 편지 낭독이 있는데, 대표가 늦는다. 비 때문에 차가 막히기도 하거니와 그녀들 또한 발걸음이 무거웠으리라.


뇌의 특정 부분이 망가지면 사람을 잘 기억 못 한다는 사실을, 엊그제 TV를 보다가 알았다. 내가 그렇다. 이름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얼굴조차 기억을 잘 못 하는데, 이런 모임에서는 쥐약이다. 그런데, 늦게 도착한 대표는 낯이 익다. ‘어? 이분들은.’ 사별한 지 한 달도 안 된 분들이다.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갖게 해주자는 의미에서, 대개 두 달까지는 일절 연락을 드리지 않는다. 수간호사 선생님께 어찌 된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더니, 그냥 웃고 만다.


자매는 초등학생 때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고, 억척스러운 엄마 덕분에 풍족하진 않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10여 년 전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병간호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생활을 위해서 자매는 학업과 결혼을 포기했다. 병원에서 제공되는 간병인 서비스가 있었지만, 늘 자매가 번갈아 가며 엄마를 돌봤고, 기관절개관을 통해 가래를 뽑는 솜씨만 봐도 그간 어떻게 돌봐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매는 무척 지쳐있었고 대부분 보호자가 그렇듯 늘 죄책감과 불안감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유독 5년간의 치매 병간호를 강조하던 어느 댁의 맏며느리와 살아생전에 교회를 같이 못 다닌 게 후회된다던 할머니의 소개가 끝나고, 낯익은 분이 마이크를 잡는다.

“다들 저를 미친년이라고 합니다.” 딸을 먼저 보내고도 늘 웃고 있어서 남들이 그렇게 부른단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도 진하고 옷도 화려하다. 비까지 오는 날에 어울리지 않게 빵모자까지…. 우리 병동에 처음 왔을 때도 그랬다. 지나친다 싶을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내가 아무리 둔해도 그 정도는 안다. 그래도 10년째 이 일을 하는 사람인데. 문득문득 스쳐 가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런 표정은 도대체 어떤 단어로 표현하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군대에 갔던 사촌 형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외사촌 동생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분명 그때 보던 표정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니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나는 그런 표정.


누가 더 슬픈지 내기라도 하는 분위기다. 타인의 상실을 들으며, 작은 위안을 서로 얻어간다. 제법 쌀쌀한 12월, 그것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 잊고 싶었던 기억이 분명 되살아날 터인데, 그런데도 그들을 여기까지 선뜻 오게 한 이유를 난 안다. 병동 수간호사 선생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죽어 가는 엄마 옆에 5살짜리 꼬마를 눕힐 수 있는 사람. 중증 치매 할아버지 얘기를 한참이나 들어줄 수 있는 사람. 살이 썩어 악취가 나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 내 가족이 정말 존엄하게 죽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