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췌장암 말기환자입니다” 2023.12.06
62살, 교사로서의 35년 삶을 뒤로하고 명예퇴직 후 시작한 택시 기사. 아내와의 유럽여행을 손꼽아 기다리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속 쓰림과 몇 번의 토악질 끝에 찾은 응급실에서 시작된 나의 췌장암. 그로부터 2년간의 사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갑자기 심해진 배의 통증. 오늘 예약된 외래 진료를 기다리며 그동안 진통제를 몇 번이나 먹었을까.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권해드릴 수 없다며 호스피스 입원에 필요한 진단서를 써준 교수님은 외래 진료실을 나설 때까지 끝내 제 눈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겐 예정된 시간까지 이 고통을 견디는 일만 남은 걸까요? 차라리 그날이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들게 견뎌온 치료에도 불구하고 현재 환자가 말기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주치의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호스피스를 권유할 수 있습니다혹은 그냥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드릴게 없습니다.’라고만 하는 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의사의 명시적인 말기 진단 이전에 이미 본인의 경과가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눈치채는 환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빠호스피스 알아볼까?”라는 말은 정말 모든 걸 포기하는 것 같아 입안에서만 머문다며 고민하는 가족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호스피스는 ‘당신을 포기합니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삶에서 편안함과 삶의 질이 유지된 생활을 기대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지 이제 3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 밤은 정말 두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낮에도 통증은 끊임없이 몸을 웅크리게 했지만 특히 밤에는 통증이 한층 심해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밤새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위해 며칠째 밤을 새운 아내도 연신 두통약을 삼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며 그렇게 망설이던 호스피스 병동 입원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첫인상은 일단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의외로 병실 복도를 오가며 운동을 하는 환자도 있었고 다리를 마사지해주는 봉사자들과의 대화 속에 간간이 웃음소리도 섞여 나오곤 하더군요. 저는 무언가 아주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로 숨쉬기 답답한 병실을 예상했었거든요. 입원하자마자 담당 의사는 통증에 대해 이것저것 한참을 물었습니다. 바로 주사를 한번 맞았고 수액병이 걸리자 10여 분 후부터 정말 놀라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던 통증이 약간의 불편감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통증이 사라지자 내가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조차 잊을 수 있었습니다.”


스피스 병동에서는 적극적인 통증 조절을 통해 환자가 오늘을 잘 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말기 암 환자의 통증은 모르핀 등의 마약성 진통제만으로 조절하기보단, 스테로이드항우울제항경련 제 등의 보조 진통제들을 잘 사용하면 마약성 진통제의 투여량이 오히려 줄고 통증은 더 잘 조절될 수 있습니다.

암 환자의 통증은 소위
 총체적 통증(Total Pain)’이라고 불리듯 신체적인 문제뿐 아니라 심리 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환자가 겪는 우울불안분노두려움 등의 심리적 문제를 약물 치료와 함께 지지적인 상담을 통해 돕다 보면 통증 역시 크게 완화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자원봉사자성직자영양사약사 등 병원의 여러 직종의 전문가들이 수시로 환자와 가족들을 찾습니다음악치료사미술치료사원예치료사 역시 빼놓을 수 없겠네요호스피스팀이 함께 만드는 시간들은 무료한 입원생활에 생기를 불어주는 훌륭한 레크리에이션이 자 환자와 가족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며 감동하게 만드는 치료의 시간이 되어줍니다.

스피스 병동에는 명의는 없어도 훌륭한 팀이 있다고 합니다. 말기 환자와 그 가족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관계와 영혼을 보듬는 일들은 어떠한 명의도 혼자 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인적인 호스피스 돌봄을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학제간 협력을 통해 만들어 내는 훌륭한 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온 지 이제 3주가 지납니다. 지난주부터는 물만 마셔도 구토가 생겨 얼음을 입에 녹여 갈증을 줄일 뿐 금식하고 있습니다. 입 마름 때문에 종종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편하지만 영양제를 맞아서인지 배는 별로 고프지 않습니다. 요즘도 통증은 하루 1~2번 정도 생기지만 바로 주사를 맞을 수 있어 크게 힘들지 않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주선해 요법실에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양복을 입었고 이번 가을에 아들과 결혼 예정인 예비 며느리도 사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말렸지만 고집을 좀 피워 제 영정사진도 찍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수고를 하나 줄여준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입니다. 미용 봉사로 머리를 정돈해두길 잘 한 것 같습니다.


기에는 구역구토입 마름, 불면섬망부종 등 여러 고통들이 말기 암 환자 삶의 질을 위협하게 됩니다호스피스 환자들은  다양한 고통을 줄이는 전문 완화의료를 제공받습니다.

따라서 임종에 이르기 전까지는 최대한 일상의 시간들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도움을 받게 됩니다임종을 앞둔 마지막 몇 주간 시간은 말기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있어 살아온 시간들 전체만큼이나 귀중한 시간일 것입니다.

호스피스팀은 환자와 가족들이 사랑을 확인하고 혹은 갈등을 치유해가는 금쪽같은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다양한 이벤트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생전 장례식자서전 출판기념식미술 전시회미니 결혼식가족사진 촬영가족음악회가족여행 등 다양한 이벤트들이 오로지 '한 가족'만을 위해 준비되고 종종 이런 시간들은 환자의 사후에 가족들이 잘 견뎌낼 수 있게 돕는 마법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월급을 모아 유럽여행을 가자던 남편은 이제 제 곁에 없습니다. 남편이 떠난 지도 이제 3달이 돼갑니다. 오늘은 사별가족 모임 초대를 받아 병원 근처 카페에 다녀왔습니다.

사별 모임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별한 가족들과 호스피스팀이 함께 하며 아픔을 서로 보듬고 안아주는 자리입니다. 사별 모임에서 만든 향초에 불을 밝히고 남편과의 마지막 시간을 떠올려봅니다. 남편은 가족사진을 찍은 다음날부터 열이 났고 가래와 기침을 반복했습니다. 폐렴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3일이 지나자 선생님은 남편이 회복하지 못하고 임종할 것 같다며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도록 1인실로 옮겨 주었습니다. 다행히 수액에 주사를 섞자 가래소리도 줄었고 심했던 기침도 모르핀 주사를 맞으니 신기하게 곧 진정이 되었습니다. 편안한 남편의 모습은 제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임종한 날은 가족이 모두 함께 있었습니다. 임종실에서의 2일 동안 우리는 남편이자 아빠인 그를 향해 원 없이 고맙다, 사랑한다 말해주었습니다. 두 눈은 감겼지만 그는 우리의 작별 인사를 품고 먼 길을 떠났을 겁니다.


스피스 병동에서는 임종 과정의 환자를 위해 별도의 임종실(1인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호스피스팀은 임종 과정이 온전히 환자와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임종기의 신체적 변화에 대해 가족들에게 미리 교육하여 불필요한 두려움과 오해를 피할 수 있게 돕습니다또한 가족들에 따라서는 처음 경험하는 경우일 수도 있는 장례과정 등의 사후절차에 대해 충분한 사전 정보제공과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스피스 돌봄은 환자가 병동에 머무는 시간 뿐 아니라 사후 사별가족들에 대한 지지와 상담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대부분의 호스피스 전문의료기관들은 체계적인 사별가족 프로그램 및 고위험 사별가족에 대한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각주
췌장암 환자의 이야기는
호스피스병동을 소개하기 위해
실제 환자의 경과 및 상담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