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 찰나의 시간에 마주한 우리] 13. 캐치볼 2024.06.19

캐치볼

의사 박중철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병동 간호사 스테이션 탁자 위에 종이 쇼핑백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겉에는 내 이름이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그 안을 보기도 전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밤사이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길 이미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쇼핑백 안에는 내 야구 글러브가 들어있었다.


1주일 전 우리는 병동 옥상 정원에서 캐치볼을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그는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당직도 아닌 날 새벽이어서 인사조차 나눌 수 없었다. 장례식장도 우리 병원 장례식장이 아닌 다른 곳이라고 하였다.

그의 마지막은 결코 평온하지는 않았다. 5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말기 진단을 받고 외과에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을 때 그는 전혀 말기 환자라고 보이질 않았다. 그 병실에서 유일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식사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가 호소하는 가장 큰 불편은 골반까지 전이된 암으로 혈관들이 막히면서 코끼리 다리처럼 부은 두 다리와 고환이었다. 뛰어다니고 싶은 그에게 어기적어기적 걸어야 하는 현실의 비애를 느끼게 했다.


대퇴정맥에 스텐트를 넣는 시술 후 다리 부종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고환부종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상태를 무척 한탄했다. 부인은 그의 옆에서 묵묵히 그를 달래고 돌봤다. 그간의 고생 때문인지 오히려 환자의 얼굴이 더 젊고 생기 있어 보였고, 무척 마른 체형에 주름이 가득 져버린 아내의 얼굴은 오히려 어머니인 줄 착각하게 할 정도였다.


회진하며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기억에 남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야구공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사회인 야구를 취미로 하고 있었다. 주로 포수를 하였는데 야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야구공을 손에서 거의 놓지 않았다. 실제 사용을 한 공이어서 겉의 가죽이 닳아있고, 흙 얼룩도 배어 있어 더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그는 이 공을 부적처럼 늘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어지간한 참외보다 크게 부어있는 고환을 거상 하여 부기를 줄일 목적으로 사타구니에 야구공을 받혀두기도 하였다.


사회인 야구를 하는 나는 당연히 야구에 관한 이야기로 그와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사실 우리 둘 사이 유쾌한 이야기는 야구 이야기를 할 때뿐이었다. 나를 비롯한 의료진들은 좀처럼 그의 불편감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궁지로 몰리는 수세에 빠져 있었다. 부종은 다시 악화하기 시작했고, 특히 밤에 심해지는 불안으로 하지의 이상감각을 호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의 불편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밤새 잠과 싸워 아침을 맞이한 후 졸린 눈으로 내 회진을 기다렸다가 반갑게 웃음 지으며 인사처럼 나랑 가볍게 2m 정도 거리에서 맨손으로 공을 몇 차례 주고받는 '토스 볼' 놀이를 좋아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옥상에서 캐치볼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고, 그는 눈을 크게 뜨면서 그게 가능하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번 주에 한번 같이해보자고 덜컥 약속하였다. 입원 후 아이처럼 들떠 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늘 수심이 가득하던 아내의 얼굴에도 웃음이 지어졌다.


그런데 공교롭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지원이 끊겨 전공의도 없고, 펠로우도 그만두고 나가 3명의 교수가 근근이 버티던 가정의학과와 호스피스 센터에 위기가 왔다. 한 명이 건강의 문제로 수술을 받고 2주간 쉬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가 회복하여 복귀하자마자 이번에는 다른 한 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거의 한 주 동안 격리에 들어갔다. 외래와 병동 그리고 강의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내 시선은 늘 캐치볼을 함께 하자던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 전 호스피스 병동으로 내려 올 때는 다리의 부종을 개선하고 나면 집으로 퇴원을 하며 가정 호스피스를 제공할 계획이었는데 이제는 집으로의 퇴원은 전혀 고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골반의 전이는 방광까지 침범하여 심한 혈뇨를 만들었다. 어느덧 그는 스스로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있었던 달의 중순쯤, 프로야구협회에서는 40주년을 기념하여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 최동원 4명을 전설로 선정하였다. 그는 아침 회진에 그 4명의 선수의 기념 카드를 내게 보여주며 그 감동을 함께 나누길 원했다. 그리고 최동원 카드를 보여주다가 이렇게 말했다. "하늘에 가면 우리 동원이형도 만날 수 있겠죠?"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만나면 안부 좀 전해 달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흠칫 놀라면서 나를 보다가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죠. 누가 먼저인지 순서가 정해져 있을까요. “나는 내가 실수를 했음을 바로 감지했다. 얼른 지난 프로야구 올스타전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환자로 이동하기 전 오늘 오후에는 꼭 캐치볼을 하자고 약속했다. 그는 2주 동안 그것만 기다렸다는 듯 "오늘은 꼭 하는 거죠?"라며 반복해서 확인하였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우리 사회복지사가 내 옆에 와서 넌지시 물었다. "OOO님이 캐치볼 언제 할 거냐고 물어봐 달래요" 나는 일단 그와 맘 편히 공을 주고받으려면 산적한 일들부터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했다.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점심도 건너뛰고 오후 3시경 대충 일들을 정리한 뒤 사회 복지사에게 4시에 옥상 정원에서 보자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명 안전공이라고 불리는 고무공을 사러 병원 근처 다이소를 갔다. 그날은 장마 뒤 무더워져 32도가 넘는 날이었다. 다이소와 근처 마트까지 뒤져서 드디어 고무공 위에 가죽을 덧대 실제 야구공처럼 실밥까지 갖춰진 안전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다음엔 주차장으로 가 차의 트렁크에서 야구 글러브 2개를 꺼내 들고 호스피스 병동 옥상 정원으로 향했다. 내 몸은 벌써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환자는 이미 휠체어를 타고 옥상 정원에 올라와 있었다


내 글러브 하나를 환자에게 건넸다. 그는 얼마 만에 만져보는 글러브인지 감격스러워야 하며 주먹으로 글러브 안을 탕탕 치면서 아이처럼 들떠 했다. 그렇게 우리는 32도가 넘은 무더위의 땡볕 아래에서 공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안전공이지만 혹시라도 그가 다칠까 봐 조심스럽게 소프트 볼처럼 언더 토스를 하면서 그에게 공을 보냈고, 그는 휠체어에 앉은 상태에서 어떻게든 세게 공을 보내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공은 종종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그래도 종종 공이 정확히 글러브에 들어왔을 때 가죽과 가죽이 쩍쩍 달라붙으면서 울리는 포구음은 우리의 귀를 시원하게 하고 쾌감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상대방의 글러브에 공을 정확히 보내기 위해 서로 노력을 했고, 소위 말하는 캐치볼의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흥분이 차오르자 그는 휘청거리면서도 기어이 일어서서 공을 던지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몇 번을 던진 후 버티지 못하고 다시 휠체어에 앉아야 했다. 아내는 신이 난 남편을 핸드폰 영상으로 담았다. 30분 넘게 공을 주고받은 후 나는 그에게 무리가 될까 봐 오늘은 그만 쉬고 내일 다시 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내일 꼭 다시 할거죠?"라며 재차 물었다. 나는 약속의 징표(?)로 공과 글러브를 그에게 가지고 있으라고 말했다. 병동으로 내려가는 내내 내가 본인에게 맞춰주느라 공을 시원하게 던지지 못했다며 자신의 몸이 더 건강하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그때 그의 아내가 무심코 속마음을 말했다. "조금만 더 일찍 걸을 수 있었을 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내의 말이 내 마음에 깊이 와서 박혔다. 아….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지난 2주간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룬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그날의 캐치볼이 무리가 된 것인지, 아니면 공을 던지기 힘들 정도로 자신의 상태가 악화된 것을 확인하게 된 것 때문인지, 아니면 바라던 캐치볼을 해서 마음이 후련해졌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다음날부터 환자의 기력은 더욱더 처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다음 날부터 침대에서 꾸벅꾸벅 조는 시간이 많아졌다. 잠시 깨었을 때 내가 가끔 캐치볼 하실래요. 물으면 그는 웃는 얼굴로 "오늘은 몸이 좀 무겁네요. 얼른 기운을 차려서 공 한번 제대로 꽂아 넣어야 하는데…."라며 넉살을 보였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난 어제 새벽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옥상에서 캐치볼을 할 때 아이처럼 환히 웃던 그 표정이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조금만 더 일찍…."이라는 아내의 아쉬움 배인 목소리도 귓가에 남아 메아리처럼 울린다.


나는 같은 사회인 야구인으로서 그에게 꼭 한번은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이제야 이렇게 한번 불러본다.


“형님! 하늘에서 동원이 형은 만나셨습니까? 내 개똥 볼 말고 동원이형 150킬로 강속구 받으면서 두 분이 즐겁게 캐치볼하고 계신 거죠? 하늘에도 야구가 있을까요? 있다면 우리 꼭 한 팀에서 한 번 뛰었으면 합니다. 내가 제대로 시원하게 꽂아 넣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