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 찰나의 시간에 마주한 우리] 14.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 2024.06.19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

간호사 한혜원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따스한 낮 공기와 달리 저녁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가을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부서를 옮기는지 1년 6개월 정도가 되었을 무렵으로 어느 정도 병동 분위기에도 적응을 하고 때때로 이어지던 임종의 슬픔도 견딜 수 있는 내면의 갑옷을 두른 상태이기도 했다.

그날은 통증으로 시달리는 환자분들 외에도 오심/구토와 호흡곤란으로 깨어 있는 것 자체로도 괴로운 환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당일 면담을 통한 당일 입원이 예고되어 있었다.


점심 식사를 거르고 입원환자를 기다리는데 복도 끝에서 낯이 익은 중년의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병원 근처로 이사하면서 이사 떡을 돌리고, 데이 근무 출근길에 새벽 예배에 다녀온다면서 한 번씩 인사를 건네던 아주머니였다. 병동이 별관 끝에 있어 많은 환자 보호자들이 길을 헷갈려 들어오는 곳이기에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외래를 안내하고 있는데, 그 뒤쪽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병색이 짙은 중년 남성과 함께 기저귀와 입원을 위한 보따리를 들고 있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을 텐데도 아저씨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터였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며칠 전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아래 집 아저씨는 어디가 많이 아파서 병원을 수시로 들른다는데 얼마 전에 가망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래. 아주머니 인상이 밝아서 좀 놀랐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눈물이 흘렀다.

“어머나, 얼마나 고생하셨어요.”라고 말하면서 몇 번 인사한 적도 없는 아주머니를 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아주머니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해했고 오히려 “괜찮아. 이제 많이 익숙해졌어.”라면서 되레 나를 위로했다.

환자와 보호자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고 어루만지되 지나치게 동화되지 않도록 다짐하고 이겨내고 가벼워지는 연습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 시간이 무색하게 무너졌다. 평소 ‘감정적인 나’와 ‘이성적인 나’를 나름 잘 분리한다고 생각했고 부모와도 친구와도 껴안고 울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환자는 입원일 수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임종했다. 평생 직업군인으로 삶을 살아온 환자는 때로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면모가 있어 보호자도 요양보호사도 담당 간호사도 조금씩은 어려운 상대였다. 특히 거대한 몸을 목욕시키려면 휠체어로 이동해 앉아서 어느 정도 스스로 씻기를 원했는데, 점점 기력이 떨어져 낙상 위험이 큰 상태로 아무래도 힘이 약한 아내와 간호사가 도움을 주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당시 남편이 병원 목욕봉사자로 활동하고 있어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언젠가 한 번 아파트 단지에서 마주치자, ‘내가 그때 호스피스인가로 들어가면 이제 죽는다고 생각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그런데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안심되고 한 달을 살면서 얼마나 간호사들이 애쓰고 일하는지 알게 되었어. 남편이 성격이 워낙에 깔끔해서 목욕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것도 참 고마웠어.’라며 두 손을 꼬옥 잡고 말해줬다.


20년이 넘게 간호사를 하면서 많은 환자를 만났다. 경중이 다르겠지만 모두가 아픈 상태로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 나의 위로나 걱정보다는 의사의 처방에 따른 나의 정확한 실행이 그들에게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이제 짐작이 된다. 뒤늦게 어린 풋내기 간호사였던 나는 아픈 사람에게 지나치게 웃는 얼굴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내 몸이 망가지고 한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나서야 진심 어린 간호 돌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원하던 호스피스에서 근무하면서 비로소 나의 간호사의 삶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고 느낀다. 때로 마음에 불순물이 섞여 못난 마음이 생기면 그날의 눈물과 맞잡은 두 손의 따스한 온기를 생각한다.


오늘은 누군가에게 마지막 여생의 하루로 생의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그들의 시간을 허투루 여기지 않도록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