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 찰나의 시간에 마주한 우리] 20.사명 2024.07.16

사명

간호사 박영미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

 

간호사로서의 18년을 줄곧 급성기 부서에 있으면서 분주하고 때로는 잡스러운 간호 외 업무에 대한 회의와 긴장감의 연속인 나날을 보내오다가 갑자기 도피하듯 호스피스라는 영역을 접한 지 어느덧 4년이 되었다.

호스피스 병동에 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나보다 먼저 와 계신 환자‘삼총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각각 40대, 50대, 60대로 세대를 초월한 연합이었다. 그중 한 분은 조현병을 앓고 계셨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보호자가 준비해온 부침개에 삼총사가 함께 막걸리를 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오셨다. ‘병원에서 막걸리를?’ 급성기 병동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니 그야말로 강퇴(강제 퇴원) 케이스였다. 그러나 수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며 허락해주는 것이 아닌가?

정말 당황스러운 장면이었지만 그분들이 잠시나마 축배를 올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감동이 찾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 틈에 섞여 함께 건배라도 하고 싶었다.

‘ 아, 이게 호스피스구나’그들에게 허락된 그 짧은 시간을 아프지 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며 인간으로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곳.


호스피스 관련 교육을 받을 때였다. 강사가“저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암에 걸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아프지만 않다면….” 이라고 말했었는데, 이제는 그 의견에 나 또한 공감한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과 같아서 저들처럼 구체적인 시간은 아닐지라도 누구에게나 ‘죽음’은 예견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기보다는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암’을 꼭 최악의 상황으로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결코 암 예찬가는 아니지만 이어나갈 한 가지 사건은 호스피스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3년 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막내 이모가 파킨슨증후군을 앓다가 5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의식은 또렷했지만 기관절개관도 가지고 있었고 사지마비까지 와서 외상 상태로 2년을 지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1명의 간병인이 9인을 돌보고 있던 그 요양병원은 저렴하고 친절하기로 나름 유명한 병원이어서 가족들은 안도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와 가족에게 어떠한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이 없었다.

원예농원을 운영했던 이모에게 만일 호스피스의 원예 요법이 제공되었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어렸을 때를 기억하며 찬송가 듣기를 즐겨한 이모에게 음악요법 선생님의 기타 소리와 찬양을 옆에서 들려주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엄마에게 조심스레 이런 말을 건넸다. “엄마, 나는 이모가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을 뻔했어. 그럼 해줄 수 있는 게 조금은 있었을 텐데”

녹녹지 않던 이모 가족에게는 의료비용의 측면에서도 부담이 컸다. 4인의 환자에게 1인의 요양보호사가 제공하는 서비스 비용이 4,200원에 불과한 호스피스는 이모와 가족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호스피스라는 단어가 주는‘죽음’의 이미지가 아직은 많은 사람에게‘마주하고 싶지 않은 영역’인 것임은 틀림없다. 환자의 대부분이 가정에 있고 싶어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완화의료를 제공하는 우리의 인식개선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호스피스·완화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아마‘사랑’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을 듯하다.

내가 추구하는‘사랑’은 인본주의적 개념을 초월한다. 살아있는 인간의 존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죽음 후의 영적 가치도 생각해볼 만하지 않은가? 떠나기 전 가족들에게 그가 남기는 메시지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호스피스·완화의료는 그 영역에 가족을 포함하고 있다.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인간에게 사랑은 때때로 이해와 용서를 낳는다. 우리는 그들이 평안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환자와 가족 간의 은밀한 문제에도 조심스레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능한 곳이 호스피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한 차원 더 높은 사명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호스피스라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리들의 태도와 가치 부여가 다 같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죽음에 둔감한 의료인이 적지 않다.


내가 처음 마주한 호스피스의 임종 돌봄의 광경은 꾀나 충격적이었다. 급성기 부서에서의 임종간호란 카테터 제거, 보호자 면회, 장례식장 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호스피스는 이마저도 달랐다. 주검을 바라보며‘그동안 수고 많으셨다’라며 인사를 건네고 정성스레 몸을 닦아준 후 가족들을 불러 모아 한 편의 시와 함께 작별을 고했다. 아직 청력은 남아있을 것이라는 의료진의 설명에 또 한 번 아쉬움의‘안녕’을 건넨 가족들은 이내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마지막 인사에 잠시 참여한 나였지만 가족들에게는 그 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모양이다. 장례를 치른 후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병원을 다시 찾은 가족들은 고인을 정성스레 보내드릴 수 있던 것에 감사를 표현했다. 처음에는‘주검을 닦고 시를 읽는다고?’ 하며 당황했던 나였지만 정작 감동은 내가 받고 말았다. 신규 입사한 어느 간호사는 임종간호의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보내드리지 못해 정말 미안하네요“ 조금은 특별한 호스피스의 임종 돌봄은 고인뿐만 아니라 남은 가족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파주병원의 호스피스·완화의료가 이만큼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인내가 있었을까? 자원봉사자를 포함해 너나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다학제 팀이 연합되어 이룬 호스피스의 성과는 가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의료인이라면 누구나 호스피스·완화의료 영역은 한 번쯤 경험해봄 직하다. 생명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한 차원 높아진다면 환자와 그 가족을 감동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정작 서비스를 제공한 주체가 성숙해지는 곳, 그것이 호스피스이며 내가 몸담고 있는 이유이다.